광주시 5.18진실규명단 핼기사격 진실 추적

전일빌딩 헬기 사격의 결론

1980년 5월 27일 04:00~05:30분경, 제1항공여단 61항공단 예하 202, 203 대대 소속 UH-1H 헬기 1대가 11공수여단 61대대 2지역대 4중대의 전일빌딩과 광주YWCA 진압작전을 지원·엄호하기 위해 호버링 상태에서 본 기종에 장착된 도어건 M60 기관총으로 전일빌딩 10층 등 건물 전면부에 수백 발 공중 사격함

► 사격 시점 : 1980년 5월 27일 04시~05시 30분
► 사격 지점 : 전일빌딩 전면부 10층 주변
► 사격 부대 : 제1항공여단 61항공단 202대대, 203대대
► 헬기 기종 : UH-1H
► 사용 총기 : 헬기 거치 M60C형 기관총

5·18 당시 투입된 UH-1H 헬기. ⓑ1980. 5. 21. 황종건 당시 동아일보 기자 촬영

<문 1> 전일빌딩에 헬기 사격을 한 부대는 어디인가?

61항공단 예하 202, 203대대 소속 UH-1H헬기이며, 정비사(무장사수)가 전일빌딩에 M60 기관총 수백 발을 사격

○ 광주광역시 5·18진실규명지원단 소속 연구분석반이 수 천 쪽에 이르는 군 관련 작전문서, 1989년 헬기 관련 고소사건 진술서, 1995년 검찰진술조서, 2006년 국방부과거사위원회 문서 등을 분석한 결과, 전일빌딩에 헬기 사격을 한 부대는 61항공단 예하, 202, 203대대 소속 헬기로 드러났음

○ 특히 본 연구분석반이 조사를 진행 중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으로부터 전일빌딩 탄흔은 ‘호버링 상태 헬기 공중사격’ ‘M60기관총 탄흔’이라는 결정적인 조사 결과를 통보받음

○ 국과수 조사 결과에 따라 헬기에 M60기관총 무기를 구축할 수 있는 기종과 해당 기종을 운용하는 부대를 역으로 탐문, 검색, 증언 등을 청취하게 됨

◯ 본 연구분석반의 조사 결과, M60을 장착할 수 있는 헬기는 ‘UH-1H’ 기종뿐이며, 이 기종을 운용하는 부대는 1항공여단 예하 61항공단임을 확인. 또한 검찰 진술조서, 군 작전문서, 1항공여단 출신 조종사들의 증언을 통해 광주에 출동했던 부대는 202, 203대대로 최종 확인함

1980년 5·18당시 투입된 61항공단 UH-1H 헬기. ⓒ광주시청 제공
5·18 당시 광주에 출동한 헬기부대의 편제. ⓒ광주시청 제공

◯ 본 연구분석반이 군 문서, 항공단 출신 예비역의 증언 등을 종합해 작성한 1항공여단의 부대 편제는 위 그림과 같으며, 1980년 광주에 투입된 헬기는 제1항공여단(여단장 송진원 준장) 예하의 31항공단(단장 방영제 대령)과 61항공단(단장 손승열 대령)임

◯ 31항공단은 103대대(AH-1J: 일명 코브라 헬기)와 500MD를 운용하는 501대대~506대대로 편제됐으며, 이들 대대 가운데 1항공여단의 직할 부대인 103대대, 501대대와 2군사령부에 작전 배속된 506대대가 광주에 출동함

◯ 61항공단은 UH-1H(수송용 헬기)를 운용하던 기동부대로 예하에 201~205대대가 있으며, U-6헬기를 운영하는 601대대가 편재됨. 이중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초일리에 주둔 중이던 202대대, 용인에 주둔하던 203대대가 광주에 출동함

<문 2> 제1항공여단 헬기부대의 광주 출동 경위는 어떠했는가?

신군부의 명령에 따라 제1항공여단장이 직접 예하 부대에 5월 21일 가스살포용 500MD와 수송용 UH-1H 10대 출동을 명령, 22일 추가로 무장상태의 AH-1J 2대와 500MD 4대 출동을 명령

○ 1980년 5·18 당시 신군부의 헬기 출동 경위는 5월 21일과 5월 22일 두 차례로, 21일에는 31항공단 506대대 소속 가스살포용 500MD 5대와 61항공단 202, 203대대 소속 수송용 UH-1H 10대가 투입됨

○ 그런데 5월 22일 신군부의 헬기 무장화와 자위권 발동 지시에 따라 31항공단 소속 103대대 AH-1J(일명 코브라) 2대와 501대대 500MD 4대가 추가로 광주에 투입됨. 이때 투입된 헬기에는 20밀리 발칸포 500발, 7.62밀리 기관총 탄약 2000발을 탑재한 상태였음

<표> 제1항공여단 헬기의 광주 투입 시기와 기종 (1995년 검찰조서)

일자

부대

기종

무기체계

5. 21

31항공단 506대대

500MD 5대

가스 살포

61항공단 202대대

UH-1H 5대

 

203대대

UH-1H 5대

5. 22

31항공단 103대대

AH-1J 2대

20밀리 발칸 500발

501대대

500MD 4대

7.62밀리 탄약 2,000발

○ 신군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공수부대의 폭압적 진압과 발포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한 시민군을 무력진압하기 위해 수도권 방위의 핵심 전력인 제1항공여단 31항공단 103대대 AH-1J 헬기 7대 중 2대를 광주로 차출, 항공작전을 전개했음

○ 또한 신군부는 수도방위의 공중 전력인 61항공단의 수송용 헬기 가운데 경기도 광주와 용인에 주둔하던 헬기 32대 중 1/3에 해당하는 10대를 차출하여 광주로 출동시켰음
 

[자료 2] 항공여단의 광주 출동 관련 진술내용
진술 1) 손승열 61항공단장 (1995. 5. 30. 검찰진술조서)

“80년 5월 21일 아침 1항공여단장(준장 송진원)이 전화로 61항공대 소속 휴이(UH-1H)10대를 차출, 전교사로 가서 전교사 지시 받으라 명령했음. 이에 61항공단장인 제가 202대대에서 5대, 203대대에서 5대를 차출함. 헬기 지휘통제는 61항공단-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전교사령관 윤흥정 장군이었으며, 전교사 상황실 명령을 수행하라고 지시받음”

진술 2) 방영제 31항공단장 (1995. 5. 17. 검찰진술조서)

“80년 5월21일 여단장이 31항공단장인 저에게 코브라 5대 광주출동 지시했는데, 실제 헬기 투입은, 5월 22일 낮 12시께로 여단장 지시에 근거해 103대대에서 코브라 2대, 501대대에서 500MD 4대를 차출 투입했음”

<문 3> 21일 광주에 투입된 헬기의 첫 작전은 무엇이었는가?

도청에 있던 공수부대 교체를 위해 UH-1H 헬기 8~10대를 투입, 도청 일대까지 기동했으나 대공사격에 의해 작전 취소. 기동 과정에서 헬기사격 개연성

○ 본 연구분석반이 군문서와 검찰진술조서를 분석한 결과, 신군부의 명령에 따라 5월 21일 광주에 출동한 제1항공여단 소속 헬기들은 오전 11시와 오후 2시 총 2회에 걸쳐 기동 작전을 실시했음

○ 항공여단 소속 조종사, 부조종사의 검찰진술조서를 보면, 모두가 가스 살포와 정찰 임무수행 도중 지상으로부터 헬기에 대공사격이 있어 작전 및 기동을 즉각 포기하고 27일 이후 부대복귀 때까지 특별한 임무 없이 부식 배달, 공수부대 이동 등 단순 기동만 실시했다고 진술하고 있음

○ 그러나 61항공단장과 202 또는 203대대 소속 조종사의 진술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어 의문점이 있음. 이날 항공단장과 달리 조종사는 검찰진술에서 8~10대의 항공기가 종대 대형으로 도청까지 정찰 비행을 했다고 진술함

○ 이에 연구분석반은 21일 13시 이후 도청 집단발포와 시민군의 무장 상황에서 모든 수송용 헬기 10대가 정찰비행을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며, 실제로 도청 주변 공수부대원의 병력교체를 위해 무장한 상태에서 도청까지 기동했을 수 있다는 개연성에 무게를 두고 있음 (헬기 병력교체는 포기, 도보로 조선대 등으로 퇴각. 이 과정에서 도청 주변에 캘리버 50 등 난사)

○ 특히 21일 UH-1H 헬기 8~10대의 종대 비행시간 전후,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 다만, 아쉬운 점은 구체적인 탄흔과 탄착점들을 확인할 수 없어 21일 헬기 사격설은 추가 조사가 요구됨 (※ 21일 헬기 사격설은 「5․18 헬기사격 종합보고서」참조)

[자료 3] 5월 21일 헬기 첫 기동작전 관련 진술내용

진술 1) 31항공단 506대대 조종사 (1989. 2. 10. 진술서)

“1980년 5월 21일 오전 11:00. 31항공단 506대대 소속 500MD 5대 중 2대가 투입, 광주지역에 가스살포 하던 중 지상에서 헬기로 대공사격이 이뤄져 복귀”

진술 2) 손승열 61항공단장 (1995. 5. 30. 검찰진술조서)

“1980년 5월 21일 14:00. 도청 일대 공수부대원과 20사단과의 교체 임무를 부여받아 203대대장이 직접 헬기를 조종한 가운데 20사단 간부 10명 탑승해 도청 일원 정찰비행 중 지상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즉시 귀대하여 보니 5발 피격 흔적”

진술 3) 61항공단 UH-1H 조종사 준위 (1989. 2. 10. 진술서)

“1980년 5월 21일 14:00. 8-10대 정도 항공기로 종대 대형, 고도 1000으로 도청 주변 정찰비행 중 지상에서 항공기에 기관총 발사해 지휘기로부터 임무 취소 통보받고 귀대함. 착륙 후 2~3대 기체에 수발 총탄을 확인”

<문 4> 광주에 투입된 헬기는 언제 무장을 했나?

5월 22일, 육군본부의 ‘헬기 작전계획 실시’ 명령서와 ‘자위권 행사’ 결정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헬기는 비무장에서 무장으로 전환하고 병력도 교체. 다만, UH-1H의 경우 21일 투입시 이미 M60 기관총을 장착했다는 증언

◯ 5월 22일, 103대대 AH-1J헬기 2대와 501대대 500MD 4대의 경우 주둔지 부대에서 이륙하면서 이미 20밀리 발칸포 500발, 7.62밀리 기관총 탄약 2,000발을 탑재하여 무장함

○ 5월 22일 헬기의 무장화는 육군본부 작전지침 ‘Hel기 작전계획을 실시하라’는 명령서에 의해 진행됨. 이 작전 명령서는 1980년 5월 22일 오전 8시 30분에 접수된 것으로 무장폭도들에게 대해 핵심점을 사격 소탕, 무력시위 사격을 하천과 임야에 실시, 버스 차량 이동사격집단에 (헬기) 사격 제압 등을 지시하고 있음

○ 또한 5월 22일 신군부는 [작장 전제 467호 발신: 2군사령관 수신: 참모총장 참조: 작전참모부장] 명의의 자위권 행사를 결정. 이 문서의 내용은 “장비 무기 및 실탄 피탈 발지를 위하여 1980. 5. 22. 10:30부로 전남 전 지역의 경찰, 예비군, 군인은 자위권 행사를 하겠음”으로 이 문서에 근거하여 공식적인 무장화가 실시된 것으로 판단됨

○ 신군부의 헬기 사격 작전명령과 자위권 공식 발동명령으로 인해 광주에 투입됐던 헬기 조종사들도 비무장에서 무장상태로 전환하고 병력도 보충하는 등 본격적인 헬기 무력작전을 준비했음. 다만, UH-1H의 경우 21일 투입시 이미 M60을 장착한 상태였다는 당시 부대원의 증언이 보도된 바 있어, 22일 기관총 탄약을 수령해 탑재했을 수 있음

[자료 4] 5월 22일 헬기 무장화 관련 군문서

◦ 「육군본부 작전 상황일지」5월 22일 11:25~13:00

- 1항공: AH-1J 2대, 500MD 1대 무장사수 탑승 2명

20밀리 기관총 1정. 목적 폭동진압
 

자료 5] 5월 22일 헬기 무장화에 대한 진술내용

진술 1) 31항공단 500MD 부조종사 〇〇〇대위 (1989. 2. 10. 검찰진술서)

“21일 광주지역 가스 살포 작전 후 CAC연병장으로 복귀하여 군중들이 사격을 한다고 보고를 하니 잘 믿지를 않았다. 저의 항공기가 도착 10분 후 UH-1H(조종사〇〇〇)가 도착을 하였다. 그리하여 조종사들이 UH-1H를 확인 결과 5발의 실탄을 맞았었다. 그리하여 저의 〇〇〇은 22일 비무장 항공기를 무장항공기로 대치하였으며, 인원도 교대하였다.(본인 혼자만 계속 상주) 그리하여 저의 항공대는 무장 항공기(실탄 장착)가 대기를 하였고”

참고) 일요신문은 21일 광주 투입시 UH-1H M60 도어건 장착됐다고 보도

5월 21일 최세창 전 장관이 사격 명령을 내렸던 장면 역시 A씨는 정확하게 설명했다. A씨는 “헬기가 도착한 뒤 최세창 당시 제3공수특전여단장이 상무대 잔디밭 위에서 지원 온 61항공단장 B 대령에게 ‘지금 당장 출동해서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제61항공단에서 지원 온 UH-1H는 7.62㎜ M60 기관총이 설치돼 있었다. UH-1H는 수송 헬기지만 적이 지상에서 총을 쏠 경우를 대비해 M60을 싣고 다녔다"고 설명했다. (제1292호. 2017. 2. 8.)

<문 5> 전일빌딩 헬기 사격 시점은 언제인가?

5월 27일 신군부의 광주 재진입 작전이 벌어진 04시~05시30분 사이에 전일빌딩 등 금남로에서 헬기 무력시위와 공중사격이 자행됨

○ 전두환 등 신군부는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키로 결정하고, 27일 시민군의 항쟁 본부격인 전남도청과 전일빌딩, 광주YMCA, 광주YWCA, 광주 관광호텔(현 무등빌딩) 등 도청 일대에 대한 최후 진압작전을 전개함

○ 진압작전은 공수부대 특공대에 의해 1차 진입과 헬기와 도보를 통한 2차 공수대원 진입, 마지막으로 목표 지점 점령 후 20사단 보병 부대에 인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음. 당시 투입됐던 공수부대 3개 여단 특공대와 주요 지휘관은 다음과 같음

투입부대

병력

투입 대상

3공수 11대대 1지역대

(대위 편종식)

13/66명

전남도청

7공수 33대대 8, 9지역대 6개 중대

20/181명

광주공원

11공수 61대대 2지역대 4중대

(대위 최영준)

4/33명

전일빌딩 일원

○ 5월 27일 전일빌딩 점령 명령을 받은 공수부대는 11공수 61대대로 이 부대와 1항공여단과의 합동작전은 26일 야간부터 시행됐으며, 본 연구분석반이 각종 군문서, 진술조서, 증언 등을 종합해 작성한 27일 새벽 전일빌딩 일대 시간대별 군 작전 상황은 다음과 같음.

<표> 11공수여단, 61항공단 전일빌딩 일대 시간대별 작전 일지

5. 26.

18:00

UH-1H 5대로 주답마을 이동 (4중대 특공대 헬기 이동)

5. 27.

01:50

조선대 뒷산 확보

 

03:30

목표지역 이동

 

04:00

전일빌딩, 관광호텔 점령

 

04:46

전일빌딩, 관광호텔 점령

 

05:13

전일빌딩서 간간히 총성

 

05:15

YWCA앞 30여명과 교전

 

05:16

무장헬기 무력 시위

500MD 도청상공 위력시위 (*군 기록에 2개로 기술)

 

06:00

위력수색, 시위비행 복귀 AH-1J 2대, 500MD 3대

 

06:20

YWCA 완전소탕, 사살 3명, 포로 29명, YWCA총격전 점령

 

06:29

헬기 환자수송 2명

 

06:40

보병 20사단 61연대에 인계

 

○ 연구분석반이 군 기록 및 증언자들의 진술을 종합한 결과,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 시점은 1980년 5월 27일 04시~05시30분 사이로 추정됨. 특히 군 문서를 보면 전일빌딩과 YWCA에서 교전이 벌어진 오후 5시 16분 무장헬기의 무력시위가 전개됐다고 기술한 점으로 미뤄 이 시간에 사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함

○ 다만, 기존 검찰수사와 국방부과거사위원회에서 모두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잠정 결론지어진 상태에서 헬기에서 사격한 부대원의 증언을 도출해 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함으로 추후 재조사가 요구됨

<문 6> UH-1H 헬기가 전일빌딩에 사격한 이유는 무엇인가?

27일 새벽 4시 전일빌딩 등 시민군이 점령한 건물에 진입작전을 전개한 11공수여단 특공대를 엄호․지원하고 시민군 화력을 제압하려는 목적

○ 본 연구분석반이 27일 전일빌딩 일대 전투상황을 종합한 결과, 11공수여단 특공대는 전일빌딩과 관광호텔 목표 지점 점령은 별다른 저항 없이 달성했으나, 당시 군 첩보에 없던 YWCA에 시민군 30여명이 오전 5시께 격렬하게 저항하는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음. 이 시각은 전남도청 내 시민군의 저항이 대부분 종료된 시점으로 유일하게 전일빌딩과 인접한 YWCA에서만 총격전이 전개되는 상황이었음

○ 군 기록에는 전일빌딩을 사실상 무혈점령한 것처럼 돼 있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을 개연성이 높음. 왜냐하면 당시 전일빌딩 내 시민군 체포자 수가 상당히 많았던 점으로 미뤄 상당한 수준의 교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임. 당시 전일빌딩에 있던 시민군은 황의수(당시 28세, 취업준비생) 등 13명이며, 이들은 공수부대와 교전하다가 이날 새벽 4시를 전후해 11공수여단에 모두 체포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음

○ 5월 27일 새벽 전일빌딩과 YWCA에서는 11공수여단 특공대에 맞서 시민군 40~50여명이 존재했고, 실제 총격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YWCA내 저항은 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공중화력 지원의 필요성이 제기됨

○ 전일빌딩과 YWCA의 전투상황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과수의 2차 감정결과서에 기록된 전일빌딩 후벽의 카빈 소총 탄흔인데, 이는 YWCA 쪽 시민군들이 전일빌딩에 진입한 공수부대를 향해 사격을 했다는 것을 의미함

- 국과수는 2017년 4월 11일 광주시에 통보한 전일빌딩 2차(최종) 감정결과서에서 “전일빌딩 뒤쪽 외벽 17개의 탄흔 가운데 12~13개는 형태로 보아 카빈 소총 탄흔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있음

- 당시 11공수여단 특공대는 전일빌딩 내 시민군을 제압한 뒤 전일빌딩 2층(옛 전남일보 공무국), 3층(옛 전남일보 편집국)으로 진입해 건물 뒤편인 YWCA에 직접 사격을 가했으며, 또한 YWCA에 진입하는 공수부대원의 엄호 사격도 가세함. YWCA건물에서 시민군 3명이 숨지고 나머지는 체포되었음

○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은,

- 첫째, 도청에 진입하는 공수부대원의 엄호를 위해 전일빌딩 내 시민군의 화력을 제압. 당시 전일빌딩 옥상에는 기관총 등이 설치돼 있었으며, 도청까지 직선거리 100M 이내로 작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음

- 둘째, 전일빌딩에 직접 진입하는 11공수여단 61대대 2지역대 4중대 병력 37명의 엄호를 위해 시민군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10층에 대한 사전 제압 사격으로 보임

- 셋째, 전일빌딩과 YWCA 사이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공수부대에 대한 공중화력 지원. 다만, YWCA에 은신 중이던 시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헬기 사격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음. 왜냐하면 공수부대원이 건물에 진입한 상태인데 헬기 사격을 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움

○ 따라서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은 전일빌딩 점령을 위해 진입하려는 공수부대에 대한 지원과 엄호를 위해서, 시민군이 은신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지점에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으로 판단됨

<문 7> 전일빌딩을 사격한 UH-1H 헬기는 27일 기동했나?

5월 27일 도청 등 금남로 일원 진압작전에서 광주에 투입된 헬기가 모두 작전에 투입됐고, 특히 UH-1H는 특공대 공중 수송 및 화력 작전을 수행

○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은 27일 새벽 04시부터 06시 전후로 판단되는데, 문제는 국가수 탄흔 감정에서 나온 M60을 장착한 UH-1H 헬기가 이날 새벽에 실제로 기동을 했느냐의 여부임

○ 본 연구분석반이 전일빌딩 헬기 사격의 마지막 퍼즐인 27일 새벽 UH-1H 헬기의 기동 상황을 확인한 결과, 정황 증거와 증언을 확보했음

- UH-1H 헬기의 27일 새벽 기동 사실은 김00의 증언이 주목되는데, 그는 27일 도청에서 헬기 레펠로 강습 사격하는 계엄군을 목격했다고 함. 헬기 레펠 강습 사격은 당시 투입된 헬기 기종 가운데 UH-1H만이 가능

[증언 1: 김00] 공수부대원 UH-1H헬기 강습 및 사격

“5월 27일 도청 후문 쪽에서 경계를 서다 새벽 4시경 도경 쪽의 패널 건물 옥상으로 계엄군이 헬기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오며 사격을 함. 전남대 화공과 동료 서호빈이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사망했음”

○ 본 연구분석반이 면담한 이00은 27일 새벽 광주천변에 공수부대원의 헬기 레펠에 의한 작전 투입이 있었고, 이들이 모두 도청 방향으로 침투했다고 증언. 이상옥의 증언은 명백하게 UH-1H 헬기에 의한 군 병력 투입작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함

[증언 2: 이00] (194*년생, 당시 전일방송 직원)

“5ㆍ18 당시 사동에 살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3~4시쯤 콩 볶는 소리와 함께 헬기 나는 소리가 들려 2층 다락으로 올라가 밖을 내다봤더니 광주천변에 헬기가 낮게 떠 있었고, 폴딱폴딱 헬기에서 뛰어내린 군인들이 전남도청 쪽으로 뛰어갔다. 헬기가 다시 날아오르더니 전남도청 쪽으로 향하면서 파바박 소리를 내며 빨간 불빛을 뿜어냈다. 그때 군트럭이 나타나 시체를 싣고 가더라.”

[증언 3: 이00] (당시 광주 동구 소태동 **교회 목사)

“ 80년 5월27일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헬기 소리가 들려 올려다 봤 더니 광주공원 쪽에서 전남도청 쪽으로 낮게 나르면서 드르륵 드르륵 2~3 번 총을 쏘더라고요. 분명히 전일빌딩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전남도청 쪽으 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화순방면으로 물러간 게엄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봤어요. 그 때 전남도청 쪽으로 가다가 남광주역 철 길에 시신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보았고, 전대병원 근처 신성보육학원 앞 도로에 이르러 시신을 또 하나 보았습니다. 아마 헬기 사격으로 숨진 사람 들 일 겁니다. 그 근처에서는 군 트럭이 시신을 수거하고 있더군요”

<참고> UH-1H 헬기를 이용한 특수부대의 레펠 훈련 모습. ⓒ광주시청 제공

<문 8> 헬기 사격을 당한 전일빌딩의 피해 상황은 어떠했는가?

전일빌딩 9~10층에 헬기 사격 총구멍이 선명한 깨진 유리창이 있었으며, 건물 전체 바닥에 진압군이 사용한 탄피가 산재.

◯ 본 연구분석반이 전일빌딩에 입주해 있던 전일방송 직원들을 집단 및 개별 면접한 결과, 27일 항쟁 종료 후 전일방송 총무부, 전일실업 개발부 직원들이 깨진 7~10층 유리창(헬기 사격 총구멍)에 대해 광주시에 피해 상황을 신고함

◯ 당시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9~10층 유리창에 총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건물 바닥 등지에 수많은 탄피 등이 산재해 있었다고 함. 당시 직원들은 출근 후 건물 전면부 깨진 유리창 총 구멍의 각도로 보아 헬기로 공중에서 사격한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눔.

◯ 전일빌딩은 헬기 사격뿐만 아니라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11공수여단 특공대의 사격으로 건물 전층 바닥에 탄피가 있었으며, 시민군이 공수부대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전개했음을 보여주는 소총과 대검이 발견되기도 했음

[증언 1: 이00] (194*년생, 당시 전일방송 직원)

“5월 27일 새벽 전일빌딩에서는 군인들이 1층부터 10층까지 총을 쏘고 올라가 탄피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옛 전남일보ㆍ전일방송 사장 비서실(3층)에는 탄피가 100개 가량 있었고, 2층 전남일보 공무국과 3층 편집국에도 탄피가 많았다. 그때 주은 탄피를 지금도 갖고 있다. 5․18 당시에는 사장 비서실로 파견되어 근무했는데, 그날 아침 출근해 전일방송국 주조정실(7층)에 올라가 카빈소총 1정과 대검 1점을 발견해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에 갖다 주었다.”

[증언 2: 이00] (195*년생, 당시 전일실업 개발부)

“5․18 당시 전일빌딩 5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전일방송 9층과 10층 유리창에 총구멍이 뚫려 있어 시청에 피해신고를 한 걸로 기억난다. 총구멍이 난 유리창에 대해 실제로 보상이 이뤄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일빌딩 1층 현관 셔터는 심하게 파손되어 보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증언 3: 김00] (195*년생, 당시 전일방송 총무부)

“5· 18이 끝나자 광주시청에서 건물, 차량 등 피해 상황을 신고하라고 해서 총구멍이 난 전일방송 유리창(7~10층)을 동구청엔가 시청엔가 피해신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몇 장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많았다는 말을 들었다.”

[참고] 광주시 작성,「건물 피해 긴급 복구 계획」문서에 보고된 피해상황

광주시는 금남로 일대 건물에 대한 유리창 피해 신고를 받았는데, 당시 문서에 따르면 광주YWCA(90장), 광주관광호텔(39장), 광주가톨릭센터(160장), 금남맨션(4장) 등 피해가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음.

1980년 5월27일 격전이 벌어진 옛 광주YWCA. ⓒ광주시청 제공

<문 9> 전일빌딩 헬기 사격과 관련하여 향후 과제는 무엇인가?

5․18진실규명특별법 제정과 진실규명위원회 구성을 통해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 부대원의 재조사 등 총체적인 진실규명 작업을 전개

◯ 전일빌딩 헬기 사격을 가한 61항공단 202, 203대대 10대의 헬기 가운데 실제 사격을 감행한 대대와 M60 장착 헬기를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 요구됨. 이를 통해 조종사, 정비사를 확인, 실제 사격의 명령과 사격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음

◯ 이 같은 미해결 쟁점을 밝히기 위해서는 조사권을 확보한 국가 기구가 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요구됨

전일빌딩 건물 외벽(검은 색이 헬기 탄흔 위치). ⓒ광주시청 제공

[참고 1] 5․18 기간 중 헬기 사격을 지시한 지휘관

◯ 31항공단장은 검찰 진술을 통해 시종일관 실제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부인하면서 3차례 걸친 상부명령을 거부한 사례를 적시하고 있음. 이는 5․18 당시 군 지휘부에 의해 실제로 코브라 등 중무장헬기를 통한 직접 사격 명령이 하달된 것이며, 실제 사격 여부를 떠나 당시 군이 헬기 사격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전개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음

사례 1)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의 명령: “광주천을 따라 천에다가 위협 사격하라” → 전교사는 당시 항공여단장, 단장 등이 명령을 거부하여 실제 사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변명

사례 2) 최웅 11공수여단장: “산 쪽 폭도들 공격중이니 무차별 제압 사격을 요청한다.” 5월 23일(24일) 11공수여단이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민군의 공격을 받자 공중 제압을 요청한 것 → 실제로 AH-1J(일명 코브라) 2대가 출동했으나 지상에 보병학교 병력이 산개해 있어 사격하지 않았다고 함. (이정부 검찰진술조서 1995.5.15.)

사례 3) 시위대 장갑차(APC)로 시외 방향 [발칸으로 사격] 요청 → 여단장이 거부했다고 검찰에서 진술

◯ 그러나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조선대 뒷산에서 위협사격을 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고 진술(1994년 검찰진술조서)

[참고 2] 전일회관(전일빌딩)의 유래와 현황

○ 전일빌딩(10층)의 공식명칭은 전일회관으로 옛 전남일보(광주일보의 전신) 사주인 김남중의 소유 건물로, 1980년 5ㆍ18 당시만 해도 광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인근에는 8층 광주관광호텔(소유주 김남중), 3층 전남도청, 7층 광주가톨릭센터, 10층 금남맨션, 9층 광주은행 본점 있었음. 전일빌딩에서 전남도청까지는 60m거리로 육안으로 전남도청을 확인 가능

○ 전일방송(V0C)은 옛 전남일보 사주인 김남중이 1971년 4월 개국했으며, 전일빌딩 7~9층을 사용했음

○ 국과학수사연구원은 4차례에 걸쳐 전일빌딩 10층 실내 및 외벽을 조사․감정한 결과, 헬기사격 총탄 흔적 193개를 발견하였음. 5․18당시 전일빌딩 10층에는 탁구대 2개만 놓여 있었으며, 이후 임대를 주지 않아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탄흔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음.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육군본부가 시민군 진압을 목적으로 헬기 작전을 지시한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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