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인재의 차이

빈 시청사 야경. ⓒ차노휘
빈 시청사 광장. ⓒ차노휘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가는 야간 버스를 예약했다가 취소하고 다음날 아침으로 변경했다. 빈까지는 직행이 없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경유해서 간다.

아마도 많은 관광객이 프라하나 슬로바키아에서 빈으로 이동했다가 부다페스트로 가는 듯했다. 오스트리아는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중심에 위치하는데 북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나는 빈 일정을 갑작스럽게 끼워 넣었다. 이미 프라하에 있으면서 부다페스트를 다녀오기 위해 왕복 비행기 편을 예약했고 취소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휴가를 간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다. 실은 내 마음도 그랬다.

교통편은 RegioJet 버스이다. 2009년 체코에서 철도회사로 설립되었다가 2015년 버스까지 확장한 기업이다. 체코 인근 국가를 버스로 이동할 때에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승무원이 버스 안에 상주해서 안내 방송은 물론 음료나 과자 등을 판매한다. 커피는 무료이다. 버스 안에 와이파이, TV 등을 기내처럼 선택해서 볼 수 있다. 승차권은 굳이 인쇄 해오지 않아도 된다.

모바일 승차권, 즉 예약번호와 여권을 탑승하기 전에 보여주면 된다. 짐을 화물칸에 실을 경우 승객들 예약번호 택을 일일이 붙여서 보관한다. 분실 우려와 짐이 바뀌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부다페스트 외곽에 있는 버스터미널을 찾기 위해 아침 두 시간을 허비한 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편하게 이동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환승을 한 번 했지만 환승 시간이 15분이었고 바로 옆 플랫폼이었다. 야간 버스는 환승시간이 2시간 40분이나 되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취소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슬로바키아로 향할 때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계속 기침을 해댔다. 막힌 공간이었던 그곳. 나는 알코올 소독제로 조심스럽게 손을 닦았다.

브라티슬라바에서 환승하고 빈으로 달릴 때 너른 들판 끝 풍력 발전기 위로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빈 U2 스테이션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세찼다. 절로 몸이 움츠려들었다. 비가 와서 우산을 펴들고 종종 거리며 승차권을 구매하기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도착했을 때 관문처럼 통과해야 할 것은 그곳에서 내 다리가 되어 줄 교통 승차권 구매와 이용방법이다. 72시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을 샀다.

빈은 크게 링 안과 링 밖으로 구분한다. ‘Ring’은 ‘반지’를 뜻한다. 중심가를 둘러싼 도로를 ‘Ring’이라고 한다. 전체 길이 4km, 폭 56m 도로로 도나우 운하 방향으로 말굽 형상이다.

즉, 빈의 중심부인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오각형의 순환 도로를 말한다. 1857년에 성벽을 철거하고 만든 도로다. 이 도로를 따라 트램 레일이 깔려 있다.

도로 안쪽에 위치한 구시가지 구역을 링 안쪽이라고 부르고, 그 밖의 구역을 링 바깥쪽이라고 한다. 링 안쪽에는 옛 건축물이 집중되어 있다. 2001년 ‘빈 역사 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곳의 관광지는 빈 여행의 핵심이기도 하다.

링의 바깥쪽에는 왕가의 별궁과 중앙 묘지 등의 관광지가 있다. 빈의 중심부인 링 안쪽은 면적이 넓지 않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링을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링 바깥쪽의 관광지들은 지하철이나 트램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메트로를 두 번을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교통편이 잘 되어 있고 실시간으로 나오는 다음 역 방송과 네온사인 활자 덕에 방향을 잃을 염려는 없다. 환승도 편하게 할 수 있어 두 번 갈아타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숙소에서 샤워하고 났을 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불쑥 야경이 보고 싶었다. 3박4일 머물러야 하는 일정을 탓했다.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완전히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고 메트로와 트램을 각각 한 번 씩 타고 빈 시청 앞에 도착했다.

그곳 야경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 오묘한 빛을 카메라에 다 담을 수는 없었다. 시청 앞에는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의 열기가 밤을 무르익게 했다.

나는 그곳을 오랫동안 서성이며 이곳에 온 것을, 야경을 보러 나온 것을 잘했다고 자축했다. 하지만 대가는 있었다. 다음날, 목이 막히면서 기침을 했다. 빈이 내게 준 선물치고는 얄궂었다.

몸이 아프니 몸과 마음이 움츠려 들었다. 창문을 등진 등 뒤로,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햇살이었다. 나는 내 몸과 시간과 그리고 둘러봐야할 장소를 조율했다. 최종적으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주제 하나만 잡자!

빈(Wien)은 영어로는 비엔나(Vienna)라고 부르기도 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다. 도나우 강변에 자리한 유서 깊은 도시이며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예술의 도시이다.

유럽 최대 왕실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쇤브룬 궁전이 자리하고 있는, 수백 년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다. 지금도 중부 유럽의 경제 · 문화 · 교통의 중심지이다.

이런 도시를 어찌 짧은 시간에 다 보고 느낄 수 있겠는가. 나는 링 안의 중심점을 찍었다. 성 슈테판 성당이었다. 일단 그곳에서 시작해보기로 했다.
 

성 슈테판 성당. ⓒ차노휘
성 슈테판 성당 내부. ⓒ차노휘


길을 나서면서 어김없이 메트로를 두 번 타고 슈테판 근처에서 내렸다. 돌바닥 길을 조금 걸으니 고풍스러운 성당 일부가 보였다. 좁은 골목은 내 시야를 좁혔다.

점점 걸어갈수록 광장과 함께 성당 측면이 드디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도 일부에 불과했다. 카메라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본당과 첨탑은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25만여 장의 기와가 사용된 지붕은 청색과 금색 벽돌 모자이크로 화려했다. 한 바퀴를 천천히 돌면서 감상했다. 어느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그 형상이 달라졌다.

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혼(魂)’이라고 할 정도로 빈의 상징이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식 성당이다.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지어졌다가 14세기 중반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8세기 들어와 성당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어 독특한 혼합 양식 건물이 되었다. 첨탑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링 안쪽의 정중앙을 차지하는 성당은, 고급스런 쇼핑의 천국인 케른트너 거리와 페터 성당, 모차르트 생가 등 여러 갈래 길로 연결되어 있다.

성 슈테판 성당 광장에는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로 붐빈다. 의자에 앉아서 성당을 감상하는 사람, 인증 샷을 남기는 사람, 쇼핑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게른트너 거리는 그야말로 사람 물결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聖人) 슈테판의 이름을 딴 성당. 매년 12월 31일 슈테판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 시민들. 

이 유명한 성당을 천천히 감상한 나는 광장 의자에 앉아 인증 샷 몇 컷을 남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양 측면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다. 강렬한 색유리를 사용해 성서의 내용을 모자이크하는데 반해 주 제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직사각형의 색유리를 사용했다.

실내 빛이 순하고 부드럽다. 정수리를 어루만지듯 부러운 빛은 기도하고 싶을 정도다. 은은한 빛을 거울삼아 기도드리듯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설교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 슈테판 성당 내부에 16세기 조각가 안톤 필그람(Anton Pilgram ; 1460~1516)이 만든 설교단이 있다. 설교단 아래에는 선(善)을 상징하는 4명의 성직자가, 설교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손잡이에는 악(惡)을 상징하는 도마뱀과 두꺼비가 조각되어 있다.

간신히 나는 도마뱀과 두꺼비를 찾았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설교단 계단 손잡이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다. 악의 상징물이라기에는 귀여운 구석이 많다.

체코 브르노 출신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안톤 필그람의 초상화도 찾아보았다. 그는 설교단 뒤편, 그늘진 곳에 자신의 표식을 남겨 두었다. 콤파스를 든 손으로 반쯤 열린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의 자화상.

설교단을 보고 난 사람들은 중간 통로에서 줄을 섰다. 입장권을 사서 탑에 오르기 위해서다. 성당 북측 탑은 승강기로, 남측 탑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남측 탑의 꼭대기는 슈테플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그곳에 올라가면 슈테판 대성당의 청색 금색의 25만여 장의 기와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빈 시내 풍경을 볼 수 있다.

북측 탑에는 수백 개의 대포를 녹여 만든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 지하에는 대주교의 묘지와 역대 합스부르크 왕가의 내장이 들어있는 항아리가 보관되어 있다. 흑사병으로 사망한 2천여 명의 유골도 있는 카타콤베다. 그곳은 가이드 투어로만 들어갈 수 있다.
 

게른트너 거리 구스타브 클림트 상점. ⓒ차노휘
게른트너 거리 상점. ⓒ차노휘


나는 이 모든 매혹적인 것보다 더 이곳에 오고 싶었던 것은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과 장례식(1791)이 치러진 장소였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음악가 모차르트. 불확실한 그의 죽음.

레퀴엠. 밀로스 포만의 1984년 작품인 〈아마데우스〉가 상연될 당시 그의 레퀴엠은 이미지와 함께 내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아마데우스(Amadeus).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일곱 살에 교향곡을, 열두 살에 오페라를 작곡한 세기의 천재. 서른다섯 살에 사망. 영화는 상당히 장난기 많고, 가볍고, 오만한 성격으로 그를 그린다.

그는 가장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자신의 음악과 파티에 더 신경을 쓴다. 돈이 부족해 늘 돈을 빌리러 다닌다. 그의 곁에 경쟁자인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있다. 그가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하면서 극은 전개된다.

나는 점점 나이가 들수록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고뇌에 동조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는 모차르트의 천부적인 재능에 비해, 노력으로 자신의 업적을 이루어낸 작곡가였다.

그는 성실했고 사려가 깊었고 처신을 잘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재능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나타나기까지 비교 대상이 없는 그의 재능은 모자라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모차르트가 뒤집어놓았다. 그때부터 그는 질투의 화신이 된다.

“저의 간절한 소망은 신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소망을 갖게 하시더니 그리고 날 벙어리로 만드셨어요. (왜죠?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요?) 내가 음악적으로 찬미하는 걸 바라지도 않으면서 왜 그런 바람을 갖게 했을까요?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보고 왜 나에게는 재능을 주시지 않는 건지, 의사에게 상담을 하면서 신을 원망하는 장면이다. 사실 예술 분야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다.

범부로 태어난 사람은 이들의 재능이 무섭다. 하지만 재능이 있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찾아오지 않는다. 안토니오 살리에리도 그것을 안다.

그는 모차르트의 천부적인 재능도 부러워하지만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모차르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많은 음악적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더 부러워했다.
 

빈 거리 밤풍경. ⓒ차노휘


“정말 놀랐고,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거였고, 초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정 본 곳은 한 군데도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머릿속에서 완성한 것을 단지 옮겨 쓴 것에 불과했어요. 마치 한 장씩 넘겨가며 받아 적은 것 같은데 들어보지도 못한 음악이었소. 음표 하나를 바꾸어도 어색해지고 한 소절만 바꾸어도 전체 구성이 무너져 버리는 그런 거였소. 언젠가 대주교의 궁에서 들었던 그 소리는 우연이 아니었소. 다시 신의 그 음성을 들었소. 섬세한 필체를 통해서 들려오는 미의 극치. 그때부터 난 신을 믿지 않았소. 당신이 자신의 도구로 오만하고 음탕하고 지저분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녀석을 선택하고선 나에겐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 밖에 안 줬기 때문이요. 그건 부당해. 편파적일 뿐 아니라 매정한 짓이야.”

이 장면은 모차르트의 부인이 모차르트를 황실 공주의 음악 교사로 채용해달라고 궁정 악장인 살리에리에게 모차르트의 작품 초고를 가져가 보여줬을 때의 놀라움을 고백하고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천재를 보는 안목이 있었고 그도 예술가였기 때문에 모차르트를 질투하면서도 그의 작품에 탄복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사랑한다.

살리에리가 독약을 조금씩 먹여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지만 짧은 생애 동안 모차르트는 천재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1791년 7월, 어떤 낯선 사람이 모차르트를 찾아와서 이 곡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고는 돈을 주고 사라져 버린다(살리에리라고 추측해본다).

모차르트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사람이 저승에서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느끼면서 작곡을 시작한다.
 

빈 거리 밤풍경. ⓒ차노휘


라단조(K. 626). 레퀴엠은 진혼곡이다.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곡이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작곡하던 도중 병을 얻어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결국 미완성인 그 곡은 자신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신은 차가운 마차 바퀴 아래 구덩이에 던져진다.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그 곡은 미완성 작품을 그의 제자 쥐스마이어가 그의 뜻을 좇아 완성한 것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나는 살리에리와 같은 고민을 한동안 한 적이 있다. 속된 표현으로 아무리 뛰어봤자 날아가는 새를 잡지 못한다는 듯이.

하지만 숨을 쉬는 그 자체에 가치를 두고 곳곳에 쓰임이 있다는 것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이렇게 홀로 여행을 하면서도 매번 재확인한다. 천재인 ‘너’도 있지만 평범한 ‘나’도 있다.

그렇다고 슬퍼하거나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결국은 내 자신이다. 비교 대상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내 행보에 집중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것보다 더 재능 있고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천재 또한 노력 없이는 빛을 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렁 빛을 발했다고 해서 다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백 년 동안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가. 주변 국가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하늘이 점지해 준 천재였다며 마냥 부러워했을까. 들여다보면 각자 그들 나름의 뼈아픈 노력이 있었을 것이고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만족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끝나지 않은 시간의 길 위에서 지금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내 행보에 집중하며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길고 짧은 것은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으니깐 말이다.
 

빈 거리 밤풍경.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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